우리의 근대사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속에서 불이 자주 난다. 강준만 교수가 들이대는 당시의 폭넓은  자료들이 그만큼 생생하고 현실감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주변국들이 문명 근대화의 길을 열심히 걸어가고 있을 때도 조선의 집권층은 대문을 꽁꽁 닫고 양반 제도와 유교 사상만을 고집하고 있었으니 나라가 망한 것도 당연하다. 나중에 외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문호를 개방했을 때는 이미 주변국과 국력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벌어져 있었다. 주위 열강들이 그런 조선을 가만히 놔둘리가 있겠는가. 

 

호시탐탐 조선을 노리는 열강들의 힘겨루기 앞에서도 지배 계급인 집권층은 여전히 흥청망청 정신을 못차리고 있었고, 양반들은 나라가 망하는 것이 지척임에도 머리위 상투를 잘리는 것에 더욱 비분강개하였다. 양반과 일제의 수탈로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던 서민들은 화장실의 태부족으로 그때까지도 여전히 길바닥에 똥을 싸대고 있었으며, 씻을 물이 귀하여 몸에서는 심한 냄새가 진동하였다.

 

사정이 이러하니 당시 조선에 부임했던 외국인들의 눈에 조선인들이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는가.

 

그들은 본국에 조선에 대한 부정적인 면과 조선인의 불결함과 미개함을 자세히 쓴 보고서들을 송고하기 시작했고, 본국으로 귀환한 사람들은 자국의 언어로 조선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책을 펴내기 시작했다. 당연한 결과이지만 시간이 흐르며 외국의 조선에 대한 인식은 점점 부정적인 방향으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갔다. 

 

조선에는 불행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흐르며 외국의 위정자들은 조선같이 미개한 나라는 차라리 문명화된 외국의 지배를 받는게 낫다는 그릇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그러한 외국의 인식은 조선이 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망국의 원인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만 짚고자 한다. 

양반은 개화기 시절에도 여전히 비록 굶주릴지언정 학문에 힘써야지 돈을 벌면 안된다는 케케묵은 생각을 고수하고 있었고, 나라의 운명보다는 자신의 가문과 머리위 상투를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자들이 조상 대대로 지배 계급으로 행세하며 부국강병에 힘쓰는 대신 서민들의 피와 땀을 빨아먹으며 개인적인 부를 축적해 오던 사회 구조는 주위 열강들이 조선을 침탈하기 시작하자 나라를 곧바로 망쪼로 이끌었다.

 

단채 신채호는 문을 숭상하는 유교가 한국의 군사적 용맹성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쳐 그 생존능력을 크게 약화시켰다고 주장했다. 신채호의 말대로 근대기 조선에서의 유학은 바로 망국의 사상에 다름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을사늑약 체결 (1905년 11월 17일) - 덕수궁 중명전에서

포츠머스 조약을 조인한 일본은 곧 이어 조선을 집어 삼키기 위해 11월 9일 이토 히로부미를 대한제국으로 보냈다. 고종은 일본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하기 위하여 선교사 헐버트를 밀사로 미국에 보내는 등 노력을 하였지만 루즈벨트의 접견 거부 등으로 허사가 되었다. 이토는 입국한 그 날부터 18일까지 한국 대신들을 협박, 회유하며 을사늑약의 체결을 강요했다. 고종은 "대신들이 의논하여 조처하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뒤로 빠져 버렸고, 황제를 협박하는 것에 국제적인 부담을 느낀 이토는 얼씨구나 좋다 하면서 대신들을 더욱 몰아 붙였다.

 

11월 17일 덕수궁 중면전에서 일제는 이지용, 이근택, 박제순, 이완용, 권중현 등 이른바 을사5적의 찬성으로 을사늑약을 통과시켰다. 이 조약에 의해 대한제국의 외교권은 일본 외무성이 갖고, 내정은 통감이 관할하게 되어 대한제국은 공식적으로 주권을 상실하였다.

 

일부 학자들은 을사5적 외에 조약 체결에 공헌한 법부대신 이하영과 탁지부 대신 민영기를 집어 넣어 을사7적으로 보는게 맞다고 주장한다.

 

을사늑약의 체결 이후, 미국 국무장관으로부터 공사관을 철수하라는 훈령을 받은 미국공사 에드윈 모건은 일본 공사 하야시와 함께 을사늑약 체결에 대한 축배를 든 후, 제국 정부에 고별 인사 한 마디 없이 서울을 떠나 버렸다. 미국은 이로써 당시 서울에 공사관을 두고 있던 11개국 중에서 일본과 러시아를 제외하고는 제일 먼저 공사관을 철수시킨 나라로 기록되었다.

 

당시 친일적인 루즈벨트를 비롯하여 미국이 보여준 일련의 배신적인 행동들은 오늘날까지도 미국을 믿지 못할 나라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증거로 인용되고 있다.

 

을사늑약의 통분을 못참고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이 한일합방 이후 노골적인 친일파로 변절한 듯한 행태들을 보인 것에 대해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은 진실 여부를 떠나 참으로 아쉬운 부분이다.

 

  <출처 : KBS1>

 

참고1) KBS 신역사스페셜 74회 고종의 밀사, 헐버트의 꿈 ← 클릭

참고2) KBS 역사스페셜 134회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 이렇게 만들어졌다. ← 클릭

참고3) KBS 역사추리 8회 을사조약 왜 무효인가 ← 클릭

 

 

통감부 설치

다음 해 2월 1일, 일본은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초대 통감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이토는 외교, 입법, 사법, 행정, 국방까지 장악하여 왕보다도 위에 있는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가 되었다. 고종은 이에 한 통의 밀서를 작성해 영국의 Tribune지 기자에게 몰래 넘겨 영국에서 발간된 신문에 실리게 한다. 주 내용은 한 마디로 "내가 조인하지 않았으니 조약은 무효다"라는 것이었다.

 

"대신들이 알아서 조처하시오"라는 말로 조약체결의 전권을 대신들에게 던져 놓고 본인은 뒤에서 수수방관하다가 나라가 망국의 입구에 이르자 그때서야 내가 동의하지 않았으니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한 고종의 행동을 어떻게 봐야 할까?

 

고종은 나아가 그 해 여름에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만국평화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1905년의 을사조약은 무효다"라는 친서를 작성하여 헐버트에게 세계 각국의 원수들에게 전달하도록 밀지를 내렸지만 만국평화회의가 연기되어 무위로 끝나 버렸다.

 

 

이준 밀사 일행의 헤이그 파견

고종은 1907년 6월에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만국평화 회의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헐버트의 건의로 이준, 이상설, 이위종 3인을 밀사로 파견했다. 헐버트 또한 헤이그로 갔다. 목적은 일제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고발함과 함께 을사늑약의 무효를 국제적으로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러시아, 일본의 방해로 일행은 만국평화회의 본회장에 들어 가지도 못했다.

 

고종은 밀사 파견을 러시아 황제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국제 정세에 어두운 고종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그 때 이미 러시아와 일본은 "일본은 대한제국을, 러시아는 외몽골을 지배함에 있어 서로 간섭하지 않는다"는 요지의 비밀협약을 체결한 후였다. 고종의 요청을 접수한 러시아는 러시아 외무부와 주일 러시아 대사 등을 동원해 고종의 밀사 파견을 일본측에 밀고했다.

 

훗날 러시아의 장교가 된 이위종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볼셰비키 혁명군 편에 서서 황제를 옥좌에서 끌어 내리는데 가담하게 되는데, 10년 전의 러시아 황제의 배신이 그의 혁명군 가담에 영향을 줬을거라는 설도 있다.

 

헛되이 세월을 보내던 이준은 7월 14일 현지 숙소인 드용 호텔에서 숨을 거두고 만다. 그의 마지막 말은 "내 조국을 구해 주십시오. 일본이 대한제국을 유린하고 있습니다."라고 알려져 있다. 시신은 당시 일본 영사가 본국으로의 운구를 끝까지 허용해 주지 않아 할 수 없이 헤이그에 묻혔다가 1963년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서울 수유동의 묘소로 이장되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추방된 헐버트 또한 1949년 한국 정부의 초청으로 광복절 기념식에 왔다가 일주일만에 사망했다. 시신은 마포구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 묻혔으며 이후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참고1) 한국사 전 5회 헤이그 특사 이준, 20일간의 외교 기록 ← 클릭

 

 

고종의 퇴위

밀사 사건으로 고종은 이토에 의해 강제 퇴위 압박을 받게 된다. 친일 내각의 한 사람인 송병준은 어전에서 권총을 차고 고종에게 자결을 강요하는 등 압박을 했고, 화가 난 고종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내각은 왕위를 황태자에게 넘길 것을 결의하였다.

 

7월 18일 일본 외무대신 하야시가 서울에 도착하여 이토와 함께 고종의 하야를 압박했다. 송병준, 이완용은 고종에게 양위안을 내밀었고 고종은 역정을 내었지만 이 날을 마지막으로 고종은 어떤 외부 인사도 만날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7월 20일, 덕수궁 중화전에서 고종의 양위식이 열렸다. 하지만 이 자리에는 황제 자리를 물려줄 고종도, 받을 순종도 참석치 않아 내시 두 사람이 신구 황제의 역할을 맡아 양위식을 거행했다고 한다.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를 통해 일제가 간도를 중국(청)에 팔아 넘기다

1909년 9월, 일본은 베이징에서 '간도에 관한 청일협약'을 체결하며 국경선을 두만강으로 인정해 버림으로써 간도를 청나라에 넘겨 주었다. 일본은 1907년 8월까지만 해도 '간도는 일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의 영토'임을 분명히 인정했던 우리의 땅이었다.

 

그러던 일본이 청에 간도를 넘긴 것은 청으로부터 남만주철도부설권과 무순 탄광개발 등 4대 이권을 얻기 위해서였다. 이로써 조상 대대로 2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며 조선 땅으로 인식되고 있던 간도의 소유권이 청으로 넘어가 버렸다.

 

1948년 제헌국회는 헌법을 만들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명시하며 한반도의 개념에 간도를 포함시켰으나, 당시 대한민국의 주권이 실효적으로 효력을 미치는 범위는 38도선 이남일 뿐이었다. 북한은 1962년에 중국과 국경 조약을 체결하면서 간도 영유권을 포기했다. 

 

을사늑약에는 일제의 조선 영토 처분권에 관한 조항이 없으며, 또한 있다고 하더라도 을사늑약 자체가 무효이기 때문에 간도협약은 원천적으로 무효이다. 

 

참고1) KBS HD역사스페셜 32회 백두산 정계비, 무엇을 말하는가? ← 클릭

참고2) SBS <그것이 알고 싶다 (2004.01.17) : 조선족 사회가 무너지고 있다.>

참고3) EBS <PD리포터 (2004.01.29) : 동북아 역사전쟁>

 

 

안중근, 이토 히로부미를 쏘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의 기차에서 내려 몇 걸음을 걷던 이토 히로부미는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 3발을 맞고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의거 소식은 전세계로 삽시간에 퍼져 나갔으며 외국인들에게 한국에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강렬하게 심어 주었다. 당시 중국에 있던 원세개는 안의사의 의거를 극찬했고, 훗날 중국의 주석 주은래는 안의사의 의거를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대 일본항쟁이 불이 붙었다고 평가했다.

 

안중근은 재판중 이토의 죄를 15가지에 걸쳐 조목조목 열거하며[각주:1] 일본의 죄상을 꾸짖었고, 이날 재판을 목도한 일본인들을 포함한 많은 방청인들은 안의사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안 의사가 1심에서 사형을 언도받자 어머니 조 마리아 여사는 아들에게 '구차하게 상고를 하지 말고 의연하게 거룩한 죽음을 맞이하여 동포들의 분노의 불길이 계속 타오르게 하라'는 편지를 보냈으며, 그의 사형이 확정되자 다시 한번 "살려고 몸부림하는 인상을 남기지 말고 의연히 목숨을 버리라"고 당부함으로써 일제하 한국 어머니의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 주었다.

 

 

참고1)  KBS 역사저널 그날 10회 안중근, 제국주의를 쏘다. ←클릭

참고2)  KBS 신역사 스페셜 15회 이토 저격 영상을 찾아라. ←클릭

참고3)  EBS 특집다큐, 안의사 유해를 찾아라 ←클릭

 

 

한일합방 (조선과 일본의 강제병합, 경술국치)

1910년 8월 22일 강제적인 한일병합이 체결됨으로써 조선은 1392년 이성계의 건국 이후 518년만에 멸망하였다.

 

8월 22일, 순종 황제가 참석한 어전 회의에서 이완용은 조선과 일본의 강제 병합안을 가결시켰다. 이어 오후에 이완용은 통감부를 방문하여 테라우치 마사타케와 함께 8개 조문의 한일강제병합안에 조인했다. 일제는 이 사실을 1주일간이나 극비에 부쳤다가 8월 29일에야 순종 황제의 옥새를 날인케 하고 병합조약을 포고했다. 조약안에 도장을 찍은 이완용, 이재곤, 조중응, 이병무, 고영희, 송병준, 임선중 등 7인을 '경술 7적'이라고 한다.

 

참고1)  KBS 한국사 전 45회: 독립협회장 이완용, 그는 왜 매국노가 되었나? ←클릭

 

 

3.1운동의 배경에 대해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했다고?)

1918년 11월 3일, 독일의 항복으로 1차 세계대전이 마침내 끝이 났다. 

전승국인 27개국은 다음해인 1919년 1월 18일부터 프랑스의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파리강화회의를 열어 전후 대책을 논의하게 된다. 한편 열흘 전인 1월 8일에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대책을 발표하는데 조선에는 그 발표 내용이 민족자결주의로 잘못 알려지게 된다. 14개 조항 어디에도 <자결>이란 말은 없기 때문이다.

 

그 연유는 영국의 로이드 조지 수상이 윌슨의 발표 사흘 전에 한 연설에서 볼셰비키의 "자결"과 윌슨의 "피치자의 동의"를 섞어 쓴 이후의 결과였다. 사실 윌슨의 14개항의 내용은 <영미 문화가 세계를 장악하고 영-미간의 외교적 협력강화>를 나타낸 것이었다.

 

아무튼 와전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우리 민족에게 큰 힘을 주었는데 1월 21일 갑자기 고종이 죽게 된다. 일제는 당시 영친왕 이은을 일본 여인 방자와 결혼시켜 파리에서 열리는 전승국 회의 기간에 맞춰 유럽으로 신혼여행을 보내어 한국과 일본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국제 사회에 과시하려 하고 있던 중이었다. 

 

일제는 고종의 죽음 시각을 22일로 조작하여 23일 공식 발표하는데 이 때부터 고종독살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민중은 급격하게 분노했고 일제에 의한 독살설은 급격하게 퍼져 나갔다 (하지만 당시 이은을 결혼시켜 국제 사회를 기만하려던 일본의 계획에 비춰볼 때 고종의 독살설은 가능성이 희박하다. 오히려 이은의 결혼식을 밀어 붙이려고 사망시각과 발표를 늦췄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고종독살설은 한국에 잘못 알려진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함께 파리에서 개최되고 있던 강화회의와 맞물려 백성들에게 일제에 대한 적개심 및 독립에 대한 희망을 무럭무럭 키워주고 있었는데, 때 마침 2월 8일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주축이 되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한국의 종교 및 각계 지도자들은 비밀리에 회의를 갖고 3월 1일 거사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게 된다 (기독교/불교/천도교). 그리고 마침내 3월3일 고종의 국장일에 맞춰 전국에서 사람들이 몰려든 기회를 이용하여 3월 1일에 노도와 같은 저항운동이 터져 나오게 된 것이다.

 

이 모든 요인들을 떠나서 3.1운동의 가장 큰 원인에 일제의 조선에 대한 무자비한 인권탄압과 수탈, 억압적인 정책이 있었음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3.1운동의 배경을 시간순으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8년 11월 3일 : 독일의 항복으로 1차대전 종식.

1919년 1월 5일 : 영국의 로이드 수상이 볼셰비키의 "자결"과 윌슨의 "피치자의 동의"를 섞어서 사용함.

1919년 1월 8일 : 미대통령 윌슨이 14개항으로 된 평화대책을 발표 → 이후 한국에는 민족자결주의로 잘못 알려지게 되나 오히려 한국민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심어줌.

1919년 1월 18일 : 파리에서 전승국 회의 개최 시작 (파리강화회의) 독립에 대한 희망이 커짐.

1919년 1월 21일 : 새벽에 고종이 돌아가심.

1919년 1월 23일 : 일제에 의해 고종의 죽음이 공식 발표됨(사망일이 22일로 조작됨) → 고종독살설이 퍼지기 시작하며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무한히 커짐.

1919년 1월 25일 : 일제에 의해 영친왕 이은의 결혼식 예정일

1919년 2월 8일 : 동경에서 조선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서를 발표함.

1919년 3월 1일 : 고종의 국장에 맞춰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3.1운동이 터짐. 

(1919년 3월 3일 : 고종의 국장 예정일)

 

참고1) KBS 신역사스페셜 7회 : 고종, 그 죽음의 진실 ← 클릭

 

(작업중..)

 

 

 

★ 위에 사용된 사진들은 구글 검색을 통하여 본문 내용의 원활한 이해를 돕기 위해 인용한 것입니다. 혹시라도 저작권 등에 위배된다면 알려 주시면 즉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All Pictures above were taken thru googling (and from youtube) for REFERENCE purpose ONLY (for better understanding of the article). If it offends against any legal right, I'll delete it immediately. Thank you.

  1. 1.명성황후를 살해한 죄. 2.한국 황제를 폐위시킨 죄 3.을사조약과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죄. 4.무고한 한국민을 살해한 죄. 5.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죄. 6.철도.광산, 산림, 천택을 빼앗은 죄. 7.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8. 교육을 방해한 죄. 9. 한국인들의 해외유학을 금지시킨 죄. 10. 교과서를 압수하여 불태워 버린 죄. 11. 한국이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2. 한국과 일본 사이에 분쟁이 끊이지 않고 살육이 끊이지 않는데 한국이 무사태평한 것처럼 속인 죄. 13. 동양 평화를 깨뜨린 죄. 14.일본 천황의 아버지 태천황을 죽인 죄. [본문으로]
Posted by 소박한 독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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