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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예술 독후감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 독후감

by 소박한 독서가 2019. 7. 17.



우리나라에 토마스 불핀치 혹은 토마스 벌핀치(이후 벌핀치로 통일)가 쓴 그리스 로마 신화의 번역본은 모르긴 몰라도 아마 30~50여 종은 될 것이다. 그만큼 그리스 로마 신화 관련 책들 중에서도 벌핀치의 작품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벌핀치의 번역판 중에서 최고의 번역본은 과연 어느 출판사에서 나온 책일까?


국내 최고의 그리스 문학 권위자 중의 한 분으로 공인받고 있는 강대진 박사가, 오래 전 시중에 있는 모든 벌핀치의 번역판을 비교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이 있다. 즉, 최고의 번역판은 바로 이윤기씨가 번역하고 대원사에서 출간한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1989)>라는 것이다! 


아쉽게도 대원사 판은 그 후에 절판인지 품절이 되었고, 대신에 같은 역자의 같은 작품으로 창해에서 2000년도에 새로운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여기에서 주목할 점은 원래 446페이지의 대원사판이 창해판에서는 무려 768페이지로 늘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윤기씨가 출판사를 창해로 옮기며 대대적인 개정 작업을 했는데, 개정판에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포함하여 대폭적인 사진과 평역, 해설 등의 추가가 이루어진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옮김'이 '평역'으로 바뀌고 이윤기씨 개인의 관점 및 해설, 사진이 대폭 늘면서 지면이 300여 페이지 이상 늘어난 것이다. 같은 역자가 번역한 같은 작품이지만 출판사가 바뀌면서 이윤기씨가 더욱 공을 들여 내용이 알차진 셈이니 독자로서는 불만이 있을 수가 없다.


번역본에 대한 이야기는 이것으로 정리하고 내용에 들어가 보자. 

시중에 많은 그리스 로마신화 책이 있지만 창해판은 그 중에서도 여러 모로 돋보인다. 창해판을 읽으며 내가 느꼈던 두 가지만 이야기해 보자.[각주:1] 


첫째, 1,000여 장에 달하는 풍부한 자료 사진이다. 

아마도 모든 그리스-로마 신화 책들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많은 사진과 그림들이 실려 있다. 거의 매 페이지마다 빽빽하게 수록된 컬러 그림과 사진에 더하여 역자의 자세한 설명과 친절한 주석은 독서를 더욱 즐겁게 해준다.


둘째, 역시 이윤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문장이 유려하고 자연스럽다. 물론 역자가 번역이 아닌 편역이라고 당당히 밝혀 놓아 벌핀치의 문장을 100% 그대로 옮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해설과 문장의 뜻은 더욱 명료하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벌핀치와 이윤기는 신화를 소개하면서 신화에 담겨진 문학적, 시대적, 상징적인 의미까지 소개하고 있다 (벌핀치는 본문에서, 이윤기는 주석과 사진 설명에서). 예를 들어, 밀턴을 좋아하는 사람은 벌핀치의 책을 읽고 다시 밀턴을 집어 들면 그 전에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밀턴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벌핀치는 책 안에서 밀턴외 다수 작가들의 싯귀들을 인용하며 문장 안에 담긴 신화와의 연계성을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다. 역자인 이윤기는 수많은 자료 사진들에 설명을 붙여 본문을 보충하거나 이해를 돕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아주 만족스러운 책이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처음 읽는 독자에게는 아마도 벌핀치의 책이 살짝 버거울 수도 있다. 위에서 말한대로 벌핀치는 신화와 관련된 온갖 문학적 인용을 서슴치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런 이유 때문에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벌핀치의 책을 최고로 꼽는 것이 아닐까.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단점도 있다. 

뭔가 하면 첫째, 벌핀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소개하며 현대인의 시각에 비추어 미풍양속에 어긋나는 이야기들은 전부 제외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저자는 머릿말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몰라도 된다고 간단히 말해 버린다. 허허. 아마도 저자는 마치 공자의 형님쯤 되는 사상과 의식을 가진 분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푸스의 신들은 오늘날의 기독교, 불교, 천주교 등과 같은 개념의 종교적인 신이었다는 점과, 고대의 사고방식은 고대 사람들의 시선과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전제가 옳다면, 벌핀치가 오늘날의 기준에서 야하다는 이유만으로 신화를 생략시킨 것은 아무리 좋게 보아도 지나치게 편협한 시각인 것 같다.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신화는 19금 이야기를 빼버려 다소 맥빠진 불완전한 신화 이야기가 되어 버렸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남녀노소 누구나 읽고 즐길 수 있는 작품이 되었다. 내용도 굉장히 문학적이며, 독자의 사유를 유도하는 훌륭한 작품이다. 벌핀치가 자신한 바와 같이 그의 책을 몇 번만 읽으면 고급 사교모임에 가서 문학과 신화를 사랑하는 교양인인 척 처신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긴 한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가장 재미있는^^ 19금의 내용을 빼버린 것은 여전히 아쉽다. 



둘째, 벌핀치판은 신화가 시간순으로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에피소드 위주로 각 사건들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나 그것들이 어떻게 상호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모를 수 밖에 없다. 보다 체계적으로 신화를 읽기 원하는 사람은 벌핀치보다는 구스타프 슈바브의 책을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이 올림푸스의 12신과 몇몇 영웅들에 대한 작은 배경 지식까지 미리 알고 있다면 벌핀치판은 최고의 선택이 되리라 생각한다. 신화를 모르는 초보자들에게도 풍부한 사진과 이윤기님의 유려한 문장으로 무장한 창해판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에피소드를 맛보게 하는데 조금의 부족함도 없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는 구스타프 슈바브의 <그리스 로마 신화 (전 3권)>와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전 5권)> 함께 가끔 꺼내어 읽고 싶은 책이다.

 

  1. 2009년에 양장본으로 다시 나온 개정판은 가격이 무려 2만원이나 인상된 45,000원이다. 양장본이 아닌 개정판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니 무엇을 개정하긴 했겠지만, 구판과 똑같은 768 페이지의 책을 25,000원에서 45,000원으로 무려 2만 원이나 올린 것은 아무리 양장본이라도 출판사가 독자를 호구로 보는 듯하여 씁쓸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개정판도 지금은 절판되었고, 현재는 다시 25,000원 짜리 구판을 판매중이다. 개정판을 포기하고 구판을 다시 팔다니 웃기는 일이다. 어쨌거나 이 포스팅에서는 개정판에 대한 글은 소개하지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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