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본 글은 저의 개인적인 상식을 넓히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중국 역사를 깊이 공부할 분들에겐 도움될 만한 사항들이 거의 없을 것이니 양해 바랍니다.

 

발해 멸망 이후 만주의 여진은 요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아구타[각주:1]는 1115년에 금나라를 세우는데 이후 요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송은 연운 16주를 돌려받을 심산으로 1120년에 금과 동맹[각주:2]을 맺고 요를 협공한다. 하지만 금은 약속대로 장성 이북을 모조리 점령한 반면에 송은 연경조차 공략에 실패한다[각주:3]. 결국 송은 금에게 연경 함락을 부탁하여 성공시킨다[각주:4]. 

 

연경이 함락되자 요의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서쪽으로 도망가 서하에 숨었지만 1125년 금에 체포되면서 요는 마침내 건국 210년 만에 멸망한다. 살아남은 요의 귀족들은 서쪽으로 도망가 요나라를 재건했는데 이를 서요라고 부른다. 요와 전쟁을 하며 송의 허약함을 눈치챘던 금의 공격으로 1126년 송은 멸망한다[각주:5]. 여기까지가 북송이다. 북송 휘종의 아들 조구(=고종)는 강남으로 피난해 임안(=항저우)을 중심으로 송의 피난 정권을 수립하는데 이것이 남송의 시작이다[각주:6]

(남송시대에 태어난 주자는 대학/논어/맹자/중용을 사서라 칭하고 오경 중심이었던 성리학을 더욱 체계화했다.)

 

1215년 징기스칸이 금의 수도인 연경(=북경)을 점령하면서 몽고족이 황하 이북을 차지하게 되는데 1234년에는 결국 금을 멸망시킨다[각주:7]. 1279년에는 쿠빌라이가 남송을 멸망시키며 몽고인은 중국을 송두리째 정복한 최초의 민족이 된다. 쿠빌라이는 수도를 금의 수도였던 북경으로 옮기고 국호를 (元)으로 칭한다[각주:8]

(중동과 러시아 서부까지 뻗은 원의 전성기 세력 지도. 비록 진(秦)과 한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긴 했지만 오늘날 중국과 비교해 보면 1/2 면적도 안되었다. 오늘날의 중국이 광대한 땅을 가진 이유에는 오히려 이처럼 이민족인 몽고(원)과 여진(금, 청)의 기여가 절대적이었다.)

 

1351년부터 몽고족을 내쫒고 한족 왕조를 되찾겠다는 사명감을 가지고 일단의 홍건적 무리가 난을 일으킨다. 홍건적은 원과 공방을 벌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원에게 밀리게 되고, 마침내 1363년에 주모자 유복통이 원의 군대에게 죽으며 반란은 실패로 끝난다[각주:9]. 한편 홍건적의 일단을 맡고 있던 주원장은 약탈을 일삼던 다른 홍건적들과는 달리 원에 맞서지 않고 강남의 안정에 힘을 기울여 강남의 지주와 사대부들의 마음을 산다. 주원장은 마침내 1368년 남경에 명(明)나라를 세우며 한족의 부활을 선포한다. 주원장은 곧 바로 북으로 진출해 화북 일대와 원의 수도 북경을 점령한다. 이로써 100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했던 몽고족인 원은 멸망하게 되는데 이를 북원(北元)이라 한다[각주:10].

(명의 건국시와 초기 최대 영역, 몽골세력)


1398년 주원장(=태조 홍무제)가 죽고 손자 주윤문이 계승하는데 그가 건문제이다. 홍무제의 4째 아들이자 연왕으로 책봉되어 북평(=북경)을 다스렸던 주체(=영락제)는 1399년 '정난의 변'을 일으키며 남경으로 진격한다. 1402년 남경을 점령한 주체는 마침내 조카를 제치고 황위에 오른다. 이가 바로 성조 영락제이다. 

 

영락제는 1406년부터 1421년까지 북평에 자금성을 건설하였다. 성이 완성되자 영락제는 북평으로 천도한 후 이름을 북경으로 고치고 자금성에 머물기 시작했다[각주:11] [각주:12]

 

베이징은 요나라 때 남경, 금나라 때 연경, 원나라 때 대도라고 불렸다. 명나라 때 영락제가 이름을 베이징으로 고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가 된다.

 

영락제는 환관의 수를 다시 늘리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5대 영종때 환관 왕진이 국정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다가 1499년에 '토목의 변[각주:13]'이 일어나게 된다. 

 

주원장이 몽고족을 장성 이북으로 쫒았으나 몽고족은 수시로 장성 이남을 넘보았고 마침내 다시 몽고족을 통합한 타타르는 1550년 '경술의 변[각주:14]'을 일으킨다. 이 무렵 왜구들의 남해안 노략질도 기승을 부렸는데 이를 총칭하여 '북로남왜의 화'라고 한다.

(출처 : 소년한국일보. 최전성기 때의 명나라 영토.)

 

명나라 대에 농업기술이 크게 발달하여 전국의 개간지가 크게 늘었으며 송나라 때부터 발달한 상업의 영향으로 대상(大商)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왕양명은 양명학을 창시했다[각주:15]. 1580년에는 마테오 리치가 마카오에 도착하여 이후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하게 된다[각주:16].

 

1592년 일본이 정명가도(征明假道)의 깃발을 들고 16만의 병력으로 조선을 들이치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명은 전쟁터를 조선에 묶어두기 위하여 원군을 파병한다. 1616년 몽골의 동쪽에 살던 여진족 누르하치는 금나라를 잇는다는 명분으로 후금을 건국한다. 후금은 1619년 랴오둥 지역을 명으로부터 빼앗는다. 

 

누르하치가 죽자 숭덕제(홍타이지)가 뒤를 잇는다. 그는 장성 이북의 몽골족을 통합한 뒤 원제국의 옥쇄를 손에 넣음으로써 후금은 장성 이북의 몽골 지역까지 차지하게 된다. 1636년에 후금은 국호를 청(淸)으로 고친다. 이후 장성을 경계로 명과 청은 여러 차례 격돌한다.

(출처: 키스무료이미지. 그림의 연대는 잘못이다. 명은 1644년에, 남명도 1664년에 완전히 멸망한다.)

 

1644년에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봉기에 의해 북경이 함락되고 숭정제 의종이 자살함으로써 명나라가 멸망한다. 이자성은 장성을 지키던 오삼계에게 힘을 합쳐 오랑캐 청을 물리치자 제안하지만 오삼계는 오히려 명황제의 복수를 내걸며 청과 손을 잡고 함께 북경으로 입성한다. 이후 한족의 명나라 부흥운동이 1664년까지 이어지는데 이를 남명(南明)이라 한다. 1645년 청은 한족 모두에게 강제적인 변발을 명령한다. 

 

1673~1681 사이에 명을 재건하겠다는 삼번의 난이 일어났지만 진압됐다[각주:17]1683년 청은 대만을 정복함으로써 중국의 통일을 완성한다. 이후 청은 강희제(1662~1722), 옹정제(1723~1735), 건륭제(1736~1795)의 황금기를 보내며 당근과 채찍 정책으로 250년간 중국 대륙을 지배하게 된다.

(전성기의 청나라 지도. 

결국 이민족인 몽고(=원나라)와 여진(=청나라)가 지금의 중국 영토를 만들어 줬다. 

죽 쒀서 개준 꼴.)

 

1840년 영국과 청 사이에 아편전쟁이 벌어진다[각주:18]. 그동안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며 최고라고 자만하던 중국은 영국의 힘을 처절하게 깨닫게 되고 결국 1842년에 영국에 손을 들며 굴욕적인 '남경(=난징)조약[각주:19]'을 체결한다. 하지만 여전히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중국 내륙으로의 진출이 금지되어 자국의 상품 판매가 부진하자 영국은 프랑스와 손잡고 1856년에 광주를 공격하며 제2차 아편전쟁을 일으키는데 이 결과 '천진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된다[각주:20].

 

이민족인 청왕조의 잇단 패전으로 한족들은 청 왕실의 힘을 얕보게 된다. 1851년에 광시성에서는 의 지배를 거부하며 크리스트교 국가를 목표로 하는 태평천국군이 일어난다. 이들은 양자강 유역을 지나 난징까지 점령한다. 하지만 내분으로 인하여 1864년에 자멸하다시피 사라진다. 

 

두 번에 전쟁에서 자신들이 우물안 개구리에 불과했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청나라는 서양의 문물을 힘써 배우되 윤리도덕과 정치사상은 중국 전통의 것을 따르자는 양무운동을 일으킨다.

 

(3부로 이어짐)

 

비고) 본문에 사용된 그림이나 도표, 사진들 중에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것들은 전부 제가 만든 것들이며, 출처를 밝힌 것들은  본문의 원활한 이해를 위하여 구글 검색을 통하여 단순 인용한 것임을 밝힙니다. 혹시라도 저작권에 위배된다면 알려 주시는 즉시 삭제토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제가 만든 그림이나 사진등은 비상업적 용도라면 허락없이 마음껏 사용하셔도 됩니다.

 

 

 

  1. 요의 지배를 받는 여진을 '숙여진' 그렇지 않은 여진을 '생여진'으로 불렀다. 아구타는 생여진에 속한 완안부의 추장이다. [본문으로]
  2. 이 동맹을 '해상의 맹약'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방납의 난'이 일어나 군사를 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이 즈음 산동의 양산박에서는 '송강의 난'이 일어나는데 나중에 '수호지'의 소재가 된다. [본문으로]
  5. 이듬해 4월, 금은 송의 휘종과 흠종을 잡아 철군하는데 이를 '정강의 변'이라 한다. [본문으로]
  6. 남송은 강남 개발에 주력하여 화북을 능가할 정도로 경제가 발전했다. 벼농사가 크게 발전했고, 상업이 발달했다. 엄청난 동전과 화폐가 만들어졌고 송의 도자기는 고려와 일본은 물론, 멀리 아라비아 반도까지 수출됐다. 광주와 천주같은 항구도시가 생겼고 서민 문화도 발전했다. [본문으로]
  7. 이후 몽고족은 끊임없이 서쪽으로 진출하여 1240년에는 러시아의 키예프를 점령하고 연이어 독일, 폴란드를 무너뜨렸다. 1258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했다. [본문으로]
  8. 1274년 마르코 폴로는 대도에 있던 쿠빌라이를 방문한다. 마르코 폴로는 곧 쿠빌라이의 마음에 들어 1275년부터 1292년까지 중국의 지방관리를 역임한다. 나중에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유럽에서 출간되며 큰 인기를 끌었고, 콜럼버스는 이 책을 읽고 신대륙을 찾아 떠나길 결심하게 된다. [본문으로]
  9. 원에 의해 만주까지 밀려난 홍건적은 1359년과 1361년에 고려를 침공한다. 공민왕이 한때 안동까지 피난했지만 결국 홍건적을 괴멸시킨다. [본문으로]
  10.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의 부인이 기황후이다. [본문으로]
  11. 명과 청대에 걸친 500년간 총 24명의 황제가 자금성에 살았다. 자금성의 바닥은 침입자나 암살자를 막기 위해 총 40장의 벽돌을 겹쳐 쌓은 것이며, 성 안에는 후원을 제외하고 같은 이유로 나무가 없다. [본문으로]
  12. 환관이었던 정화는 영락제의 명으로 1405년부터 1433년까지 무려 7번에 걸쳐 세계를 탐험한다. [본문으로]
  13. 왕진의 말을 듣고 오이라트와의 싸움에 출진한 영종이 토목에서 수만 명의 병사를 잃고 적에게 사로 잡히는 사건. 이에 격분한 황제의 호위무사들이 왕진을 때려 죽인다. [본문으로]
  14. 타타르가 북경을 에워싸고 공격한 사건. 다행히 중국 각지에서 원군이 모여들어 북경의 함락은 피했다. [본문으로]
  15. 사물을 통해 理를 구한다는 성리학을 비판하고, 理는 이미 나의 마음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리학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노력으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선천적으로 갖고 있는 도덕적 개념을 지행합일의 실천을 통해 성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16. 천주교의 포교는 청대에 들어 벽에 막히게 된다. 로마 교황청 등이 제사를 금했기 때문이다. 이에 강희제는 마테오 리치의 입장을 이해하는 선교사들만 중국에 머물게 하였으며 옹정제는 천주교 자체를 금지하고 선교사들을 추방시켰다. [본문으로]
  17. 한족 무장들에 의한 반란으로 운남의 오삼계, 광동의 상지신, 복건의 경정충이 주도했다. [본문으로]
  18. 영굳은 중국으로부터 도자기, 비단, 차 등을 많이 사갔다. 하지만 영국은 중국에 팔 것이 많이 없어서 결과적으로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빠져 나갔다. 영국 정부는 은을 환수하기 위하여 인도에서 재배한 아편을 몰래 중국에 퍼뜨리기 시작했다. 청조정은 영국의 아편을 몰수하고 영국왕에게 항의했다. 그러자 영국은 중국을 상대로 전쟁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아편전쟁이다. [본문으로]
  19. 이 조약으로 5개 항이 개항되었고 홍콩이 영국으로 넘어 갔다. [본문으로]
  20. 북경조약에는 중국이 추가로 10개 항구를 개항, 외국인의 내륙여행 권리를 인정, 구룡반도를 영국에 할양, 연해주를 러시아에 양도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소박한 독서가

댓글을 달아 주세요